역사적 배경

수원화성 축성에 대한 
역사적 배경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인해, 폐해가 극심했던 구 정치체계의 개혁 을 위해, 그리고 은퇴 후 수원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해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화성행궁을 신축했으며 화성을 쌓았다.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뒤주 속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 했던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의 유택(幽宅)인 영우원(永祐園)을 1789년(정조13) 풍수지리상 최길지(最吉地) 의 명당으로 지목된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부터 정조대왕은 수원 백성들을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먼저 수원의 새로운 읍치(邑治)를 팔달산 기슭(당시 지명은 신기리(新機里))으로 옮기면서 행정·치안기관인 관아와 교육기관인 향교, 교통기관인 역참(驛站), 상가, 도로, 교량 등 도시 기반 시설을 마련하고 민생 대책을 강구했다. 또 사도세자의 묘역이 조성된 구 읍치에 살던 백성들('수원하지초록(水原下旨抄錄)'에 따르면 244호-인구 677명)에게 넉넉한 보상금과 이사비용을 나 눠주었다. 
아울러 수원부에 감금된 죄수 전원과 수원부 사람으로서 유배 중에 있는 이 들도 풀어 주고 수원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해주는 등 특별 조치를 베풀었다. 
정조는 화성유수부와 인근 백성들의 지세(地稅)와 부역을 감면해 줬으며, 환곡과 군포를 탕감하거나 감축시켰다. 뿐만 아니라 임금이 주최하는 각종 연회에의 초대, 각종 공사에 대한 시상,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 하사, 문ㆍ무과 별도 과거를 통한 지역 인재 등용 등 각종 특혜와 민생 대책을 시행했다. 
특별과거인 별시는 정조대왕의 능행차 때마다 실시됐는데 수원과 인근의 유 생, 한량, 군인, 무사 등이 응시하도록 특별 배려했다. 특히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 회갑연이 열렸던 해의 능행차 때에는 임 금이 친히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를 실시, 문과 5인, 무과 56인의 급제자를 선발하기도 했다. 
그런데 1790년(정조 14)에 실시한 과거 때는 합격된 사람 들 중 3명이 수원 호적자가 아님이 밝혀져 합격이 취소되고, 이들을 징벌 해 군대에 보내야 한다는 신하들의 청이 있었으나, 정조대왕은 합격만 취소 시키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 일도 있었다. 최홍규 교수에 따르면 "수원과 인근 지역민들은 매우 이례적으로 매년 실시 되는 이 문·무과 특별 과거시험을 통해 관계(官界)와 군(軍)에 진출할 수 있었고, 이 고장 백성들은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 과정을 통해 사회적 신 분 상승의 기회도 그만큼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도시를 이전하고 행궁 등 관아 건물을 지을 때, 또 화성을 축성할 때 예전과는 달리 임금을 지급하면서 일꾼을 모집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예전에는 강제 징발된 부역군들이 공사를 맡았었다. 조정 대신들은 재정적 부담으로 인해 백성들을 부역시키거나 승려들을 동원 하자고 건의했지만 정조대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임금을 지불하라고 강력히 하교했다. 
그 결과 수원은 물론 전국 각지의 백성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을 차질 없이 진행 할 수 있었다. 오히려 공사가 끝난 뒤 조정에서는 8도의 백성들을 돌려보내는 데 크게 고심할 정도였다고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돼 있다. 
정조대왕은 행정·군사·상업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갖춘 수원을 건설하기 위해 국비 6만5천냥이라는 거금을 수원 백성들에게 꾸어주면서 공업과 상업을 촉진, 18세기 말 대도회·상업 도시 수원의 번영을 가져오게 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이때 수원의 제지 수공업 발전을 위해 4천냥의 금융지원을 통해 북부면 지소동(현재 팔달구 연무동)에 제지공장을 차렸으며, 팔달구 우만동 봉녕사는 두부제조를 전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출처 http://www.swcf.or.kr/ 수원문화재단